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마을숲과 당제를 지켜온 물건리 대동회_경남 남해

2020. 10. 5 오후 2:52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 조사일 : 조사일 : 2016. 5. 31.

마을의 유래와 현황

물건리는 남해군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과거에는 배를 타야만 육지로 이동할 수 있었으나, 현재는 남해대교와 창선삼천포연륙교가 건설되어 도보나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남해군 12경 중 10경에 해당하는 물건방조어부림과 독일마을로 유명하며,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영화촬영지와 낚시터로 각광받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물건, 은점, 대지포 등이 있다. 물건(勿巾)은 지세가 ‘물’(勿)자 혹은 ‘건’(巾)자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윗마을, 큰마을, 고랑마을, 독일마을 등으로 구성된다.

2001년 들어선 독일마을은 1960~1970년대에 광부나 간호사 등으로 독일로 건너간 교포들의 국내 정착을 돕기 위해 조성한 곳으로 독일식 건축물 등에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은점은 마을 뒤에 은(銀)광산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대지포는 은점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온천으로 유명하다. 특산물로는 멸치와 멸치액젓이 있다.

물건리 해안에는 아름다운 마을숲이 있다. 1만 2천 그루의 나무가 우거진 이 숲은 3백 년 전 고기떼를 부르고 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되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숲이 바닷바람과 파도를 막아줄 뿐 아니라 바닷물에 짙은 그늘을 드리워 고기떼를 불러 모은다고 하여 방조어부림이라 부른다. “숲을 해치면 부락이 망한다.”는 푯말이 서있으며, 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1933년에 해일이 있을 때 실제로 덕을 보았다는 실화도 전해진다.

마을사람들은 이 숲이 해를 입으면 마을이 망한다고 믿어 정성스럽게 보호해 왔다. 일제강점기 말엽 일본인들이 목총을 만들기 위해서 이 숲에서 7그루의 느티나무를 자르려고 했을 때 마을사람들은 총칼에 맞서 “이 숲을 없애겠다면 차라리 우리를 죽여 달라”고 맞서 숲을 지켜내기도 했다.

숲 속에 서 있는 이팝나무 노거수는 서낭당나무이며, 음력 10월 15일에는 이 나무를 대상으로 제사를 올려 마을의 평안을 빌고 있다.31) 물건방조어부림은 1959년 1월 23일에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었는데 면적이 2만 3438㎡에 이른다. 이 방풍림(防風林)은 지역의 생활사를 고스란히 담은 문화유산이며 현재 주민의 공공소유와 관리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이 숲은 바닷가를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길이 1,500m, 너비 약 30m 정도의 규모이다. 나무의 높이는 대체로 10∼15 m이며 상층목이 약 2,000그루이다. 주요 수종은 푸조나무·팽나무·참느릅나무·말채나무·모감주나무·느티나무·이팝나무·상수리나무 등이 있으며, 상록수종으로는 후박나무가 있다.

산자락과 바다로 둘러싸인 물건리의 자연 마을은 하나의 독립된 지형적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4개의 마을이 서로 떨어져 있는 형태로 형성되었지만, 생업을 함께 하면서 같은 마을에 산다는 소속감을 형성하여 왔다. 각 성씨별로 특정 마을에 많이 거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친인척 관계에 있는 주민들이 4개 마을에 함께 섞여 살고 있어 성씨별 혹은 거주하는 마을별로 독립된 정체성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물건리에서 가장 많은 성씨이자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는 전주이씨는 1680년경에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물건리의 형성도 17세기 중반 이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민들에 의하면 전주이씨들이 이주를 해오기 전에 이미 은점마을과 인접한 곳에 문씨 성을 가진 주민 몇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전부터 소수의 주민들이 이 마을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건리에 인구가 증가하고 취락이 발달하게 된 것은 전주이씨들의 이주가 이루어진 이후로 보인다. 전주이씨가 1680년경에 정착을 하고 자손들이 번성하면서 취락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1740년경에 경주김씨가, 1800년대 초반과 중반에는 함안조씨·경주이씨·밀양박씨가 이주를 해오면서 총 5개의 성씨를 중심으로 현재와 같은 마을로 발전하게 된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 물건리는 지역중심지 역할을 수행할 정도로 발전을 하게 된다. 1913년 2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면사무소가 물건마을에 위치하기도 하였으며 야학회가 조직되어 70여 명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물건리는 넓은 농토와 고수익을 올리는 어업을 배경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대형어업인 권현망을 하는 어민이 3가구나 될 정도로 어업이 발달하였고 다른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와 돈을 벌기 위해 물건마을로 이주하였다. 주민들에 의하면 1950~1970년대 무렵에는 물건마을이 ‘돈곶’이라 불릴 정도로 돈벌이가 좋은 마을이었다. 이 무렵 물건마을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주변에서 부자마을로 통했다. 이는 1962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물건리는 총 가구 수가 430호나 되는 큰 마을로 농토가 비옥할 뿐만 아니라 마을 앞바다에서 멸치·참치·삼치 등을 어획하면서 연평균 3억 원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30~40퍼센트가 기와집이고 대학 졸업생 혹은 재학생의 수가 30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까지 번성하였던 물건리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여느 어촌마을과 같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1981년에 1,110명이나 되었던 인구는 이후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6년에는 619명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하였고 2008년에는 536명까지 감소하였다. 이와 같이 물건마을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 이유는 어업이 정체기에 접어들면서 파산을 하는 어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젊은이들이 학업이나 취업을 목적으로 고향을 떠나 도시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남해군 통계연보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물건리의 인구는 268세대에 541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공동체조직 전승 실태

70여년 전까지 반상회라 불리기도 했다는 물건리 대동회는 여전히 마을 일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구심점이 되는 대동회 외에도 청년회, 어촌계, 노인회, 개발위원회, 부인회가 운영되고 있다.

대동회의 주요 행사는 12월 말에 개최하는 총회와 음력 10월 15일에 열리는 동제가 있다. 동제를 지낼 때는 남자만 참여한다. 동제를 지낼 때 전에는 생기복덕을 가려 유사를 선정했으나 더 이상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 인근의 미륵암에 제물값으로 100만원을 주고 제물을 마련한다. 세 명의 유사가 제복을 입고 제를 지내는데 이장이 준비를 주도한다.

현재 마을에는 230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주민이 모두 대동회원이다. 임원은 이장이 당연직으로 맡는 회장과 총무, 부회장 등으로 구성된다. 대동회 임원의 임기는 2년이며 이장은 1회 연임이 가능하다. 현재 마을주민 수는 300세대, 총인구 450명이며 65세 이상은 전체의 70%에 이른다. 모든 주민이 대동회에 참여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독일마을이 조성된 이후 외지에서 상업을 목적으로 독일마을 등으로 이주해온 세대가 100세대에 이른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대동회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마을에서 홍보관을 임대해주고 어촌계에서는 남해군에서 운영하는 요트학교에 건물을 임대해줘 수익을 얻고 있으며, 이는 마을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물건리 마을에 내외부적으로 변화가 일고 있다. 마을 인근에 독일마을이 들어오면서 외부에서 들어온 인구가 많아졌다. 외부인들끼리 모여 살아 도로를 기준으로 독일마을 쪽의 외부 유입인과 토착민의 거주공간이 나누어져 있으며, 땅값 차이도 많이 난다고 한다. 마을 내부적으로는 주민의 고령화로 인해 노인회에서 노인복지를 맡고 있었는데, 대동회와 노인회의 회원이 겹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대동회에서 노인회로 지원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대동회를 구심점으로 마을 공동의례 지속

물건리에서 매년 음력 시월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행하는 동제는 ‘당제형’에 속한다. 보통 당제는 삼헌(三獻)과 독축(讀祝)으로 이루어지고, 나이가 많은 사람 중 생기복덕이 맞고 정결한 이를 뽑는다. 보통 제주 한 명, 집사 한 명, 축관 한 명을 선출한다. 그러나 물건리 동제는 메를 올리고 삼헌례를 하지만 독축을 하거나 소지는 올리지 않아 유교식 제의가 변형·축소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제관들은 음력 시월 보름날 오후 5시에 윗당산부터 제물을 진설한다. 제물은 돼지머리, 팥시루떡, 삼색나물, 탕, 조기 따위의 각종 생선구이와 생선전, 꼬치, 밤·대추·곶감(또는 감)·사과·배 따위의 각종 과일 등을 진설한다. 진설 준비는 제관 부부와 이장, 마을주민 5~6명이 함께한다. 요즘은 해가 지기 전에 동제를 지내기 때문에 진설이 끝나는 즉시 제의를 시작한다.

먼저 제관 부부는 서쪽 방향으로 절을 한다. 윗당산에서는 1시간 남짓 제의가 이루어진다. 상당제가 끝나면 한지에 메 세 묶음을 싸서 트럭에 싣고 아랫당산으로 간다. 아랫당산에 도착하면 제관은 메와 술을 각각 올리고 재배한 뒤 넓적한 돌 아래에 땅을 파고 메를 묻은 다음, 술과 음식을 사방에 뿌린다. 메를 묻은 구멍을 ‘밥구덕’이라고 하며, 해마다 동일한 곳에 밥구덕을 만든다. 다음으로 제관은 마을의 한쪽 동구 밖인 동천고개로 가서 메와 술을 올리고 재배한 다음 밥구덕에 메를 묻는다. 그리고 다른 쪽 동구 밖인 은점고개로 가서 동일한 순서로 제의를 행한 뒤 마을로 돌아온다.

윗당산과 아랫당산, 동천고개와 은점고개에 각각 제의를 지내고 메를 묻는 것에는 춘하추동, 동서남북 언제 어디서나 동민들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잡귀와 액, 살, 재앙 따위를 막아 마을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동구의 상당과 마을 안의 하당 외에 마을로 들어오는 양쪽 고갯마루 길 옆에서 제의를 지내는 것으로 보아서 밖으로부터 마을로 들어오는 잡귀와 액운 따위를 막아내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어촌이기 때문에 풍어의 기원과 해상 사고 방지에의 기원도 담겨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제의 과정이 끝나면 주민들이 주민센터에 모여 음복하는 것으로 동제를 마무리한다.

이주민 증가 속에 물건리 마을 공동체의 변화

꾸준히 감소하던 물건리의 인구는 2008년 이후 조금씩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도시로 이주해서 살고 있던 주민들이 은퇴 후 귀향을 하면서 나타난 변화이기도 하지만, 물건리가 관광지로 유명해짐에 따라 나타난 변화이기도 하다. 물건리를 중심으로 인근에 독일마을 등의 관광지가 조성되고 이들이 각종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언론매체에 소개가 되면서 물건리가 남해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관광업을 위해 외지에서 이주를 해오는 사례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10년 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관광지로서의 정체성 변화는 물건마을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한편 물건숲을 잘 보존한 결과, 환경부에서 지정한 ‘자연생태우수마을’에 4회 연속 지정되었고 해양수산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어촌마을’,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또 행정자치부의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 마을로도 지정되었으며 산림청 주관의 ‘아름다운 마을숲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여 <맨발의 기봉이>(2006), <고독이 몸부림칠 때>(2004) 등의 영화와 TVN <인어이야기>(2006), MBC <환상의 커플>(2006) 등의 드라마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물건숲이 각종 매체에 등장하고 각종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마을주민들이 숲을 잘 가꾸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마을 부녀회에서는 남해군에서 매년 300만원을 지원받아 숲 관리를 해 오고 있다. 부녀회가 중심이 되어 매달 쓰레기 줍기와 풀베기, 화장실 청소 등을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 남해군은 후계목을 보식하고 나무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과거 물건숲이 마을주민들의 삶터이자 쉼터였다면 현재는 여름철 더위를 피하는 많은 피서객의 쉼터이다. 물건마을이 관광지로 각광받으면서 물건숲에는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 숲 동쪽의 방파제는 캠핑장을 겸한 낚시터로 인기가 좋은데 물건방파제는 갯바위낚시터 못지않을 정도로 조황이 뛰어난 곳으로 소문나 있다. 최근에는 해맞이 장소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특히 숲 서쪽편의 동천고개에서는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어 매년 1월 1일에는 해맞이 관광객이 몰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