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서낭과 미륵장군_강원 고성군 죽왕면 문암진리

2020. 10. 5 오후 3:31

마을 현황

  • 세대와 인구: 215가구 415명.
  • 역사와 유래: 간성군 죽왕면은 1919년 간성군을 고성군으로 개칭하면서 토성면과 함께 양양군에 편입되었다. 1953년 대한민국 관할이 되었고 1954년 공식 수복이 되었다. 죽도면의 ‘죽’자와 왕곡면의 ‘왕’자를 따서 죽왕면이라 하였다. 고성군의 남쪽에 속하는 죽왕면 문암리는 속초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동해안 도로에 인접한 마을로 해안을 접하고 있다. 만호리, 괘진리, 망포리, 망개리 등의 속칭이 있다. 예전에 신라장군이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여 미륵동이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부인은 애끓는 한이 남아 죽어서 뱀으로 변하고 나를 해하지 않고 보살펴 주면 신라사람 만호가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해서 ‘만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인이 뱀을 죽이자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망포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개울을 바라보는 마을이라 하여 ‘망개’라고 불렀다. 1919년 괘진과 망포를 병합하여 문암진리로 되었다가, 그 후 문암리로 고쳐 불렀다. 1954년에 현재의 문암1리로 분리되었다.
  • 주요 소득원: 옥수수, 들깨, 콩, 고기잡이.
  • 마을의 특징: 총 7개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1, 2, 3반을 ‘앞불’이라 하고 6, 7반을 ‘뒷불’이라 한다. 문암리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와 어업을 병행하고 있는데, 농사보다는 30여 가구가 종사하는 어업의 경제적 비중이 높다. 속초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동해안 도로에 인접한 마을로 해안을 접하고 있어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마을주민이 여름 한철 텐트를 빌려주고 경제적 수익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오토캠핑장이 새로운 가족단위 캠핑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마을에서는 캠핑가족의 적극적인 유치를 위해 죽왕면 백도해수욕장 일원에 마을형 해변 캠핑장을 새롭게 조성했다. 백도마을로 이름을 정한 것은 일명 흰섬이라 불리는 백도가 해안에서 약 500m 떨어져 있는데 갈매기 배설물로 섬 전체가 덮여 백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출과 일몰 때 섬의 장관은 옛날 임금님이 살던 커다란 성처럼 우람하게 보인다고 한다. 마을 산 밑 지표에는 융기문, 손톱무늬 회갈색 토기편이 다량 수집되기도 했다. 1997년 국립문화재연구소 검사 결과 신석기 시대와 철기시대 유물로 추정되어 남한의 신석기 문화 이동경로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마을공동체 전통유물 전승실태

[마을 민속과 문화 환경]

문암1리 백도는 ‘망개’라 불리는데 예전에 일만 호가 살아서 ‘만포만개리’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신라유민들이 들어와 어업과 농업을 겸업으로 하여 살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영토 확장으로 고구려 군사들이 침략하였다. 이때 신라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장군이 이들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으나 갑작스런 침략과 군사력의 부족으로 혼자 남게 된 장군은 이곳 해안의 바위 밑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장군은 마을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하였던지 장군이 죽은 자리에 난데없이 돌로 된 미륵동이 생겨났다. 장군이 돌아올 날 만을 기다리던 고향의 부인은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아왔으나 기다리던 남편은 죽고 미륵동만 남아 있었다. 비통함과 애절함을 참지 못한 부인은 바닷가 미륵동 옆에서 밤낮을 슬피 울며 애통해 하다가 기진맥진하여 죽게 되었다. 죽은 후에도 남편의 혼인 미륵동을 지키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부인의 혼은 뱀이 되어 미륵동을 지키게 되었다. 죽을 때 부인은 내가 죽어서 뱀이 되어 미륵동을 지킬 것이니 나를 해하지 않고 보살펴 주면 신라사람 만호(萬戶)가 거주하여 온 마을주민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이 마을을 만호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이 소문을 들은 고구려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부인의 혼인 뱀을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본 마을주민들은 멀지 않은 시기에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조선말엽에 와서는 망포리(亡浦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가 그 후 마을 앞에 개(浦)가 있고 개울을 바라보는 마을이라 하여 망개라고 불렀다. 그 후 1919년에 문암리로 그리고 1954년에 문암1리로 분리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삼일날 마을 앞산에 있는 숫성황신과 바닷가 암성황신에게 제를 지낸다. 문암진리 서낭제는 새벽 4∼5시경에 행한다. 현재 제관은 이장이 맡아서 주관하고 전에는 제물비용을 가구당 걷었는데 사람들이 해수욕장을 많이 찾게 되면서 여기에서 나온 돈으로 마을기금을 마련하여 제를 지낸다. 음식 장만은 깨끗한 사람을 선출해서 마을회관에 금줄을 치고 한다. 금줄은 제관 가운데 깨끗한 사람이 꼰다. 제물은 대구포, 메, 과일, 백설기, 막걸리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숫서낭-암서낭-미륵장군 순으로 올리며 지게에 제물을 담아 지고 다니며 진설한다. 3년마다 별신제(서낭굿)가 행해졌는데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공동체 민속 유물]

  • 숫서낭: 숫서낭은 마을 뒷산에 있는데 현재 이곳에 군부대가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전에 조그맣게 있던 당이 낡아 헐어서 다시 지은 지 10여 년 된다. 당은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벽돌로 벽을 쌓았다. 이 마을에서는 제를 지내면서 연한 하늘색 적삼과 바지, 두루마기를 숫서낭에게 바친다. 옷은 나무에 걸어 두며, 지난해에 바쳤던 옷은 새로 제를 지낼 때 태운다고 한다.
  • 암서낭: 암서낭은 옛날에 염전이 있었다고 하는 염전거리를 지나서 백도해수욕장을 통해 북쪽으로 올라간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커다란 바위가 풍화작용으로 인해 암석 속에서 비어 있는 부분이 심하게 패여 구멍이 만들어진 것이다. 수십 개의 자연석 구멍이 있으며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제를 지내는 날에 이 구멍에 나무로 지름 5㎝정도 남근 모형을 깎아서 박아놓는다. 남근은 동네 뒷산에 올라가 오리나무를 베어다가 깎는다. 남근을 깎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는데 자신의 집에서 누구도 보여주지 않고 깎는다고 한다. 때로는 제관들이 깎기도 하며, 15개 정도를 깎아서 흰 백지에 싸 놓았다가 제의가 있는 날 암서낭으로 가져간다. 남근을 봉헌한 어부가 고기가 잘 잡히지 않자 홧김에 암서낭당에 가서 육담으로 욕설을 퍼붓고 바다로 나갔더니 만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암서낭에게는 제물과 함께 빨간 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준비해서 바친다. 남근은 옷에 함께 묶어 놓기도 하고 구멍에 박아놓기도 하며, 지난해에 바쳤던 옷은 제를 지낼 때 태운다고 한다. 암서낭은 시집을 못가고 바다에 빠져 죽은 여성이므로 암서낭제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한다. 5년마다 풍어굿을 할 때 무당이 주관하여 암수서낭신을 굿당에 봉안하고 합사한다.
  • 미륵장군: 미륵장군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란히 서 있는데, 좀 더 마모가 된 장군이 할아버지 장군이라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금강산에서 장군을 깎아 거진항에서 배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가고자 몇 차례 시도를 했으나 거친 파도로 인해 장군이 물속에 빠져 모래펄에 파묻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무녀들이 굿을 하고 몇 해 만에 찾아서 지금의 자리에 모셔놓았다고 한다. 백도마을 심덕출 옹은 돌 위에 솥을 걸어 불을 피웠다가 한쪽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었는데, 결국 심덕출 옹이 솥을 걸었던 돌이 미륵장군이 모습을 드러낸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미륵장군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지금의 자리로 모셔지게 되었다. 할머니장군, 가로 50㎝ 세로 140㎝ 둘레 160㎝, 할아버지 장군, 가로 50㎝ 세로 152㎝ 둘레 15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