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삼굿과 단종성황당_강원 영월군 중동면 녹전리

2020. 10. 5 오후 3:54

마을 현황

  • 세대와 인구: 50가구 110명.
  • 역사와 유래: 191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녹전리와 유전리가 통합되면서 녹전리로 개명되었다. 녹전리에는 녹반리, 행금벌, 응고개, 시누리, 유전리, 도화동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유전리(柳田里)에는 고려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전리는 마을 일대에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윗마을은 상유전, 아랫마을은 하유전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 영월신씨와 김영김씨 일가가 정착한 이후 강원도의 대표적인 산촌마을로 그 전통이 잘 남아 있다. 약 350여 년 전에 모셔진 성황당을 비롯하여 혼례용 가마, 각종 농기구 등 마을에서 수집한 각종 민속생활유물이 마을의 민속자료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1965년 화전정리사업을 기점으로 화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 다수가 마을을 떠났다. 매년 9월말 삼굿축제, 송이따기 체험을 개최하여, 관광객들이 산촌사람들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주요 소득원: 콩, 옥수수, 황기, 더덕, 고추, 고랭지 배추, 메주, 된장.
  • 마을의 특징: 유전리 일대는 골과 고개, 재 등 산촌 지형이 형성되어 있어 이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유래되고 있다. 유전리 입구에 자리한 ‘산봉안’은 평평한 밭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주변이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어 그렇게 불린다. 상유전 북쪽에 위치한 ‘골안’은 그 길이가 약 2km에 이르며 정선군 신동읍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은 삼신을 모시는 당(堂)이 있던 골짜기로 ‘삼신당 골’ 또는 ‘지당골’이라고 하였다. 과거 4월 초파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골 안 지당에 메를 지어놓고 치성을 드렸던 지당 터가 아직도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골짜기는 옛날부터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짐승을 잡으러 들어가도 잡지 못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골짜기 안에는 지당 터가 있는 ‘지당골’, 옛날 절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절터 골’, 해가 잘 들지 않는다 하여 붙여진 ‘음달골’, 토종벌의 벌통이 많은 ‘설통바위골’, 석회가 나는 곳이라 하여 ‘횟골’ 등이 자리하고 있다. 하유전에서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재를 덧재라고 부른다. 이 고개의 뒷산을 큰 산이라고 부르는 데서 기인해 덧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항상 구름이 눈처럼 재 밑에 있다 하여 ‘설운재’로 부르는 곳 아래에 ‘설운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현재는 석회석 광산이 들어오면서 주민이 모두 이주한 상태이다. 유전리와 이목리 사이에 있는 봉두고개는 고개 양쪽으로 높은 산봉우리가 두 개 자리하고 있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이 고개는 영월에서 석항, 화원리 쪽에서 수라리 재를 넘은 후 이목리를 지나 직동, 상동 방면으로 통하던 고개로 길손들이 남긴 돌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유전리와 이목리 사이에 자리한 ‘창고개’는 옛날 곡물을 보관하던 창고터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영월, 석항, 화원리 쪽에서 수라리재를 넘은 후 이목리를 지나 직동, 상동 방면으로 통하던 옛길이다.
  • 마을사업 현황: 삼굿축제는 2001년부터 개최되어 2016년에는 6천여 명에 육박하는 체험객이 다녀갔다. 2012년에 숙식이 가능한 펜션형 생태관과 식당, 수영장 등의 부대시설을 건립하여 적극적으로 방문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또한 계절과 시기별로 지역의 자원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전통혼례, 생태숲체험, 토속음식체험, 가재잡기, 소원지 태우기, 민속놀이, 나무공예 등)을 운영하고 있다. 2002년에 강원도 ‘새농촌건설운동우수마을’로 지정된 이래 2004년에는 녹전리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생활유물을 상시적으로 전시하는 민속자료관을 건립하였다. 2009년에 농림수산식품부의 녹색농촌체험마을, 2011년에 산림청의 산촌생태마을로 선정되었다. 2011년에 체험휴양마을로 선정된 이후 정부 지원을 받아 마을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전통유물 전승실태

[마을 민속과 문화 환경]

상유전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성황당은 아름드리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곳에는 단종대왕이 성황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약 300여 년 전부터 마을에서 성황제를 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미신타파의 명목으로 전국의 성황당이 불태워졌으나 유전리는 당시 신준묵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 어른들이 나서서 지켜냈다고 한다. 윤전제로 한 달 이상을 3명씩 한조가 되어 당집 마루에 자리를 깔고 숙식을 해결해 가며 성황당을 지켜, 보존 상태가 좋은 모습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성황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자정부터 15일 새벽까지 지내는데 당주와 제관, 축관, 집사 등을 그해 생기복덕에 맞춰 정한다. 성황당과 당주, 제관 등의 집에 금줄을 치고 그 주변에 황토를 뿌려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잡귀와 잡인의 출입을 금하여 부정을 예방하였다. 제사 절차는 당주 댁에서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고 강신, 참신, 독축, 소지, 음복 순으로 이뤄졌다. 고사 축문에는 단종대왕에게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화재, 수재, 풍재와 같은 재앙을 물리쳐 달라는 주민들의 기원이 담겨있다.

녹전리 일대 마을에는 설운골과 도타리 등의 자연마을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설운골에는 삼성석회가 들어서 있고 도타리 마을은 주민들이 모두 외지로 이주하여 빈집만 남아 있다. 도타리 입구는 지금도 팥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봄철이면 그 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이 숲을 지나 도타리 마을 입구 오른쪽 산에 탑 모양의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이 바위 앞에는 아름드리 참나무(상수리나무과)가 자라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는 참나무와 함께 자란다고 전해지며 마을에서는 이 바위 앞에 성황당을 지어 매년 보름 전날 저녁에 당고사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바위에 기도를 드리면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처녀총각이 기도를 드리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설이 전해진다. 실제로 설운골과 도타리에 사는 처녀총각들의 사랑이 이뤄졌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상유전 마을에는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어 마을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마을이 안녕하고 주민이 화목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한다. 실제로 주민들은 마을의 성황당에서 앞산까지 소나무를 심고 마을 곳곳에 느티나무 등을 심어 가꾸었다고 한다. 

[공동체 민속 유물]

  • 삼굿 가마: 삼굿은 본래 삼베를 생산하기 위해서 거치는 제작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의류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면·견직물이 대량생산되면서 삼굿마을에서는 삼베를 제작하려는 목적과는 별개로 삼굿을 활용하여 옥수수, 감자, 돼지고기 등을 구워 먹는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과거 마을주민들이 삼굿 작업을 공동으로 하였을 때 개별적으로 자기 소유의 대마를 표시하기 위해서 삼가마에 옥수수 등을 넣었는데, 이것이 유래가 되어 현재는 삼 대신에 각종 음식들을 넣어서 구워먹는다.

  • 산촌형 가옥과 디딜방아: 산촌형 가옥은 최○○씨의 집으로 방 1칸, 부엌 1칸 등으로 구성되었다. 디딜방아는 부엌에 남아 있다.
  • 성황당: 성황당은 돌로 단을 쌓고 나무로 기둥을 세운 가옥 형태이다. 매년 성황당에 모신 단종대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단종대왕이 영월에서 서거한 후 그 혼이 돌고개를 넘어 태백산맥으로 가고 있을 때 만난 수라리의 추익한이 평소대로 단종에게 머루를 따서 문안 인사를 드린 후 뒤따라 죽어 단종과 함께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 그네: 민속자료관 마당과 느티나무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 혼례 가마: 과거 전통혼례를 올릴 때 신부가 타던 가마가 민속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 민속자료관: 2001년 당시 이장의 주도 하에 마을 자체적으로 민속생활유물을 수집하여 2002년 민속자료관을 건립하였다. 산촌의 생활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양한 생업 도구들을 수집·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