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5) 마을공간의 스토리 자원화

2020. 10. 6 오후 4:23

도래수마을은 전설에 옥녀가 지상에서 내려와 정착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명당이라고 할 만큼 풍수지리적으로 다양한 지명유래가 전하고 있다. 먼저 도래수마을의 본래 이름인 분통의 지명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분통마을에 동화정이 있는 독산은 본래 풍수적으로 개구리의 형상이고, 분통마을 뒤에 있는 구불구불한 능선은 뱀의 형상이며, 마을 앞의 산은 청룡의 형상이라고 한다. 어느 날 이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있었는데, 그 순간 청룡이 나타나 “이놈!”하고 소리를 치니,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달려오던 뱀이 뒷산으로 혼비백산 달아나면서 분통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이 마을을 분통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옥녀가 세수한 다음 분 바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마을 입구 쪽에 동화정이 위치한 숲을 홀로 떨어져 있는 산이라고 하여 독산 또는 독뫼라고 부른다. 동화정이 위치한 곳의 뒷산 능선을 경사등이라고 하며, 앞산 능선을 비룡등이라고 한다. 경사등은 풍수지리적으로 뱀의 형국으로, 개구리를 잡아먹으려던 뱀이 용에게 들켜 멈춰 선 후 경사등이 되었다고 한다. 비룡등은 옥녀가 지상에 내려올 때 타고 온 용이 잠든 곳이라고 한다. 뱀에게 개구리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동화정 주변으로 수풀을 조성하였다.

동화정이라는 것은 이쪽 앞이 전설의 고향 옛날에 여러 번 나왔습니다. 요곳이 용이고 이건 사두야. 뱀머리. 개구리야.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은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인위적으로 나무를 심은 거야. 왜냐하면 개구리를 감추어야 여기서 뱀이 잡아먹으려고 오는데 용이 여기서 딱 지키고 있으니까 멈춰버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강○○(남, 71세)의 제보(2017년 9월 27일)>

그 외에 옥녀가 설거지를 하는 곳이었다고 하여 구시물등이 있다. 구시물은 전라도 사투리로 설거지물을 말한다.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로 아버지의 명을 받고 지상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뜨리기에 좋은 자리를 찾던 중 소년바위와 혼례를 치르고 도래수마을 뒷산에 자리 잡았다고 하며, 그 자리를 옥녀단자혈이라고 불렀다. 옥녀봉은 통사골과 분재실 사이에서 쭉 뻗어 나온 작은 봉우리를 말한다.

지금 우리 조상 산에 가면. 우리 동네 왜 그러냐하면 우리 조상 산에 가면 우리 조상 산이 옥녀단자 혈이라고 하거든. 옥녀라는 것은 하늘이 옥녀라고 하잖아.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는 옥황상제가 계신다. 그리고 옥황상제의 딸내미가 옥녀다. 그래가지고 옥녀라고 해. 지금 같으면 천사라고도 할 수 있을까. 하늘나라를 얘기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인간이 이렇게 퍼졌다 그 말이야. 그 옥황상제 딸내미 옥녀가 지상에 와서 인류를 퍼치고 살아야겠는데 한 번 가봐라 명지를 찾아서. 옥녀가 내려 올 때 비룡을 타고 내려왔어. 용을 타고. 내려 와가지고는 지상에 명지를 찾는 중인데 하늘재를 넘어서 또 용치재를 넘어서 노령산맥으로 내려가지고 또 오다가 이제 소년 장군을 만나가지고 그래가지고 또 용소로 들어가가꼬. 용이 안 것을 실소가 있는 자리 그 용소를 만들어주고. 또 내려 와가지고 자기가 거처할 데를 요렇게 와가꼬. 우리 동네를 건너와가지고 요리 가가꼬 자기가 앉힐 자리가 시방 옥녀단자 혈이다 그랬어. 그래가지고 용은 앞에 뉘어서 그 안에 용소가 있어. 뉘운 물을 먹케 해주고 그렇게 하고 옥녀는 그 가 있고. 그러면 옥녀가 인간 세상에 그렇게 왔는데, 오는 과정에 지명들이 다 있거든. 용소 있고 용소에 가서 구시소가 있고. <강○○(남, 84세)의 제보(2017년 9월 27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두 개의 골짜기를 볼 수 있는데, 오른쪽 골짜기가 통사골이고 왼쪽 골짜기가 분재실이다. 통사골은 대장군 통사영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분재실은 옥녀의 화장품인 분가루를 담은 계곡을 의미한다. 두 골짜기 사이로 장군봉, 관천봉, 검바위, 기초봉이 있으며, 분재실 안으로 또 투구봉과 학바위봉이 있다.

분 만드는 골짜기여. 이것은 옥녀가 쓸 수 있는 분가루를 만드는 곳이고 분재실이. 그리고 요 놈은 장군이 통치를 하는 막사터다 그 말이여. 군영지라 그 말이여. 그러면 이 안에 검바우가 또 들었어. 칼 검자. 빼쭉하게 보이요. 그러면 검바우 있제, 통사골이 있제. 장군봉 있제. 그런데 여기에 비룡등 뒤에 있잖아요. 또 요 안에 가면 관천봉이 있어. 빼쭉하니. 관천봉은 볼 관자여. 하늘 천야. [조: 하늘을 본다.] 이것은 지상천이나 다름없어. 장군이 어떤 일을 하려면 지상천이 있어야 혀. 그러면 강천봉이 있제. 장군봉이 있제. 검바우가 있제. 또 옥녀단자 뒤에 가서는 요렇게 솟구쳤거든. 기초봉이 있어. 기초봉은 군이 갈 때 깃을 들고 나가는 거여. 기초병이 있어. 깃대 기자. 깃대 들고 나가는 거여. 우리는 무슨 진영이다고. <강○○(남, 84세)의 제보(2017년 9월 27일)>

옥녀가 지상으로 시집오면서 생긴 지명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먼저 가마골에 대한 여러 가지 지명유래설이 전하고 있다. 길게 늘어진 가마골 계곡의 모양이 마치 사람이 타고 다니는 가마와 같고, 옥녀가 소년바위에게 시집갈 때 이 길로 가마를 타고 갔다고 하여 가마골(輦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이곳에 그릇을 굽는 가마의 터가 많았고,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뒷산이 시루봉의 형국이라서 떡을 잘 익게 하려면 밑에 불을 땔 가마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마골(釜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가마골의 지세가 깊고 험하여 한 번 들어가면 잘 나오지 못하였기에 이를 감옥살이에 비유하여 ‘가막살이’로 부르다가 가마골이 되었다고도 한다.

가마골의 진입로를 따라 왼쪽을 보면 주름무늬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부르며, 옥녀가 시집갈 때 이 치마를 입고 갔다고 한다. 마골의 입구에서 약 2km 정도를 더 가면 민가가 나오는데 그 민가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족두리 모양의 산봉우리인 쪽두봉이 있다. 이 산봉우리를 쪽자봉, 시루봉 등으로 다르게 부르기도 한다. 옥녀가 시집갈 때 이 족두리를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