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물레방아와 상여_충남 공주시 우성면 봉현리

2020. 10. 5 오후 4:20

마을 현황

  • 세대와 인구: 82가구 173명.
  • 역사와 유래: 우성면에 속한 봉현리는 차령산맥의 지류가 뻗어내려 감싸고 있는 산간오지에 자리한 마을이다. 원래 북쪽은 우정면, 남쪽은 성두면으로, 우정면은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피난 중에 소에게 물을 먹인 소우물에서 유래했고, 남쪽 금강변의 성두면은 성터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우정면과 성두면이 통합되어 우성면 봉현리로 개편되었으며, 1995년 공주군이 공주시와 통합되면서 공주시 우성면 봉현리가 되었다.
  • 주요 소득원: 벼, 고구마, 콩.
  • 마을의 특징: 봉현리는 동서로 형성된 깊은 골짜기에 일곱 개의 마을이 배산임수의 지세에 기대어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봉현리의 곡창지대를 이루는 양청들과 봉현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지명은 양씨들이 들어와 농경사회를 먼저 이루었다 하여 ‘양청들’이라 했고, 이 들만이 평평하고 햇볕이 많이 들어 ‘볕 양(陽)’자를 쓰고, 항시 푸르른 들판이기에 ‘푸를 청(靑)’ 자를 써서 ‘양청들’이라고도 했다는 설이 전한다.

마을공동체 전통유물 전승실태

[마을 민속과 문화 환경]

마을이 형성된 조선시대 이래 봉현리는 청양의 정산 문화권에 속했던 마을이다. 공주까지는 50여 리나 떨어졌고, 돌다리를 건너고 고개를 넘어 나룻배로 금강을 건너야 공주로 접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주까지는 숱한 재를 넘고 물을 건너는 험로였기 때문에 공주 장을 보려면 새벽에 길을 떠나 늦은 밤에 귀가하는 고된 여정을 감수해야 했다.

봉현리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창녕성씨로 후사가 없어 절손되었으며, 신창표씨도 입향 성씨로 거론되나 일찍 마을을 떠났다. 후에 전주이씨와 남원양씨 등이 입향하였는데, 이 마을 앞에 널리 자리한 토지를 양청들로 부르는 것은 남원양씨들이 전답을 많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골이 깊은 산간에 자리한 봉현리는 지리적인 특성상 골짜기와 관련된 지명과 유래담이 많이 전한다. 보신이골(保身洞)은 몸을 보호해주는 골짜기란 뜻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팔도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보신동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연로하여 위중한 병이 들자 지극정성으로 온갖 약을 달여 드렸으나 차도를 보이지 않아 크게 상심했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어 애를 태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사가 이르기를 “내가 어머니의 병을 고칠 방도를 일러줄 테니 호랑이로 변해 개를 잡아서 바쳐라”고 하면서 주문을 외워 호랑이로 변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도사가 일러준 대로 주문을 외고 재주를 한 번 넘으니 과연 호랑이가 되었다. 효자는 밤마다 호랑이로 둔갑하여 개의 간을 어머니에게 바쳤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부인이 몰래 남편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종이에 적힌 주문을 외우고 호랑이로 변하여 밖으로 나가는 남편을 보고 종이에 적힌 주문을 불태워버렸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남편은 그 길로 팔도를 떠돌며 호랑이로 살게 되었다. 그래서 팔도호란 이름을 얻었으며, 사람을 몹시 증오하여 마주치는 대로 살상을 일삼게 되자 포수를 동원하여 팔도호를 사살했다고 전한다.

봉현리 거리제는 대보름에 거행하는 동제이다. 쑥불을 만들어서 거리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백 년이 조금 더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거리 양쪽에 길게 횃불을 피우고 제를 지낸다. 음식으로는 시루떡을 하고 1년 동안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비는 소지를 올린다. 2∼3년 전까지 마을을 활성화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마을 공동자금으로 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자금 부족으로 중단된 상태이다.

상엿집은 사룡동과 묘재 사이에 있는 용머리산 기슭에 위치한다. 정면 1칸에 건평 3평 내외의 작은 집이었던 상엿집은 40여 년 전에 뒤편의 탑골로 옮겼는데, 당시 길을 지나던 한 대사가 이르기를 “학교 터는 명당인데 상엿집이 옆에 있어서 안 좋다.”라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주민들은 미관상 흉하다 하여 초등학교가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로 상엿집을 이전했다가 10여 년 전 전시관을 지으면서 없앴다.

[공동체 민속 유물]

  • 상여: 봉현리 상여는 농경문화자료관 안에 있다. 자료관은 봉현리 상엿소리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건립한 것으로 전시실에는 마을사람들이 소실되어가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하여 놓았다. 마을의 상례제구와 물품 그리고 농경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생활도구와 농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3개의 상여가 있다. 예부터 사용하던 12명이 메던 가마는 형태가 그런대로 보존되어 있으나 색이 바래서 보수가 필요한 상태이다. 1996년 봉현리에서는 상여소리를 소재로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상엿소리 재현을 위해 연습용으로 제작한 12명이 메는 상여와 32명이 메는 상여에는 산신과 동자상이 장식되어 있으며, 봉황과 여의주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봉현리에서 사용하던 전통 상여는 정면 74㎝·측면 207㎝·높이 70㎝의 목재이다. 32명이 메는 상여는 정면 92㎝·측면 250㎝·높이 170㎝의 목재이다. 12명이 메는 상여는 정면 85㎝·측면 235㎝·높이 170㎝의 목재이다.
  • 요여: 요여는 경연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상여와 함께 제작한 것이다.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가는 작은 가마로 출상 때 상여꾼 앞에 서는데, 가마와 형태가 유사하고 사방에 혼백을 안치하는 문이 달려 있다. 정면 69㎝·측면 91㎝·높이 130㎝의 목재이다.
  • 방상시탈: 봉현리 전시관에 있는 방상시탈은 전문가의 고증을 받아서 제작한 것이다. 짚으로 만들어 2개는 눈이 4개 달린 것이고 1개는 예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늘게 새끼를 꼬아 엮어 만든 귀모양도 눈에 띤다. 탈은 가로 25㎝·세로 40㎝, 귀 길이 15㎝·폭 6㎝이다. 상여를 운구할 때 앞에서 방상시탈을 쓰고 방상 두 명이 우측과 좌측을 번갈아 가면서 춤을 추고 칼로 잡귀를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 쌍정주나무: 봉현리에는 마을 위, 가운데, 아래에 각각 정자나무가 있다. 특히 전주이씨의 입향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쌍정주나무의 왼쪽은 둘레가 660㎝, 오른쪽은 460㎝로 4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이며 2015년 비바람에 한쪽 가지가 부러졌다. 사람으로 치면 한 쪽 팔이 잘려나간 것과 같은데, 나무가 워낙 크다 보니 부러진 나뭇가지에 영향을 받지 않고 형태는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른 가지에는 부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받침목을 대 놓고 있다.

  • 정자: 쌍정주나무 옆으로 쌍괴정이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정면 480㎝·측면 460㎝·높이 310㎝이다. 정자는 마을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