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백중놀이를 복원한 관상리 일관회_전북 김제

2020. 10. 5 오후 2:58
  • 전북 김제시 청하면 관상리
  • 조사일 : 2016. 4. 12.

마을의 유래와 현황

고려 말 마천소가 마천면으로 바뀌었고, 마천면에서 다시 청하면으로 행정 지명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관상마을은 정월에 굿을 할 때에 큰 기(깃발)를 마당에 세워 두었다. 그러면 인근 마을의 풍물패가 지나가다가 관상마을이 어른이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익산의 기세배놀이는 원래 관상리에서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일대 마을에서 풍물을 제일 잘하는 동네로 관상리가 꼽혔고, 두 번째로 장화리, 세 번째가 평고리였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어릴 적에 ‘관덕계’라는 이름을 문서에서 본적이 있는데 그 문서에는 회원자격 등의 내용이 있는 서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 거주하는 성씨는 보성오씨(55%, 350년 전 이주해옴)와 양주조씨(25%, 정조 때 200년 전 이주해옴)가 가장 많다. 이외에 해주오씨, 동복오씨 등 소수의 성씨들은 오씨와 조씨의 객(처·외가·친척 등)으로 마을로 이주해 왔다. 관상마을은 ‘앞뜸’, 관동마을은 ‘뒷뜸’, 관신마을은 ‘땅골’이라고 부른다. 현재 관동, 관신, 관상에 110호, 23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65세 이상이 70% 수준으로 주민의 고령화가 높다. 귀농·귀촌인은 8가구로 마을 출신 4가구, 타지역 이주민 4가구이다.

공동체조직 전승 실태

관상리 백중놀이는 오래전부터 마을의 큰 행사였다. ‘일관회’라 불리는 전통 조직은 마을의 3대 행사인 설·백중(음력 7월 15일)·정월대보름 행사를 관할했다. 일관회는 동계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향약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2016년에는 마을주민의 화합과 소속감을 위해 백중놀이 행사를 복원하였다. 당산제, 풍물, 줄다리기, 기싸움을 비롯해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사라진 김매기 농요를 시연하였다. 백중행사는 오전에 풍장을 하면서 제사상(과일, 돼지머리 등)을 차린 후, 제복을 입은 제관이 축을 읽고 제사를 마무리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김매기 농요와 농악공연, 줄다리기, 씨름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대동계에서는 3개 자연마을의 이장이 돌아가면서 총무를 맡고 있다. 현재 3개 마을에 총 110가구, 230명이 거주하는데 마을주민 전체가 일관회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일관회의 회비는 집집마다 사정에 따라 내는데 2만원부터 90만원까지 다양하다. 회원들에게 돈을 받으면 영수증을 써 주고 있다. 회원의 나이 제한은 없으며, 대부분 고령이라 장수상과 회갑상 등을 주고 있다. 백중놀이의 술과 먹거리는 마을 부녀회에서 돌아가면서 준비하고 있다.

얼마 전에 약 70년 된 대동계의 기록이 모두 소실되어, 명맥을 잇기 위해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록에 신경을 쓰고 있다. 회장은 마을 대동계 조직의 목적부터 정비하고 사업기록을 정리해 나갈 계획이다. 최근 마을에서는 마을사업 차원에서 마을에 들어오는 입구 3곳에 비석을 세웠다. 그 외에는 주로 백중놀이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 대동계 회의는 8월 10~15일 사이에 열리는데 해마다 주요 안건을 정해놓고 회의를 통해 모두 결의한다.

마을주민의 고령화로 인구가 줄어들면서 행사에 참여할 인원도 부족한 상황이다. 마을행사 참여자를 확대하기 위해 주민들의 자녀들도 초대하기로 하였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로 하여 찬조금 등은 별도로 받지 않고 있다. 마을행사 참여자가 자식 세대로까지 확대되면서 참여인원이 증가하고 젊은 참여자도 확보하는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관상리는 마을공동체 차원에서 백중놀이를 복원하게 되면서 주민의 화합뿐 아니라 자녀 세대까지 아우르는 세대 간의 화합의 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1977년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시작된 ‘일관회’

백중놀이는 “일꾼들 술 먹이는 술멕이 하는 날”이라 부른다. 이 날에는 잘사는 집에서 술을 담가 내놓았고, 모자라는 것은 주조장에서 조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유지되어 오던 것이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전통이 약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행사를 주관하던 어른들이 돌아가시자 명맥이 끊길 위기에 이르렀다.

1977년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백중행사를 다시 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주민 화합과 친목도모를 위한 행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이런 모임과 마을행사를 주도한 공동체 조직이 바로 ‘일관회’이다. 일관회는 관상리, 관동리, 관신리 등 3개 마을이 모여서 하나의 ‘관’으로 화합하자고 만든 조직이다.

마을주민 오○○ 씨는 “백중놀이는 현재 환갑인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시작되었는데 7월 술멕이 행사를 하면서 술도 마시고 공도 차고 놀았다. 예전에는 마을주민들이 순번을 정해서 백중놀이를 준비했는데 백중놀이와 술멕이의 음식은 마을에서 돈을 모아서 마련했다. 처음에는 모여서 놀다가 밥은 각자 집에 가서 먹었지만, 그 후 밥도 같이 모여서 먹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백중놀이는 일관회가 주관하였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하루종일 놀았다. 일관회에 가입하는 나이는 60세 이상이었으나 몸이 불편해 참여가 저조해지자 40세 이상으로 변경하였다. 일관회 회비는 모금을 통해서 만들어진 마을자금으로 충당했으며, 1970년대에 2만원씩 내는 사람이 있었다.

백중놀이는 아침 9시부터 놀기 시작해서 점심을 같이 먹고 저녁 전에 마무리됐다. 백중놀이를 마친 후에는 어김없이 학교 운동장에서 풍장이 이어졌는데 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이 있었다. 관상, 관신, 관동의 주민들이 한 마을 같이 잘 뭉쳤기 때문에 다른 마을 주민의 참여가 필요치 않았다. 이웃 마을에서 같이 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행사방법만 전수했다.

한편 오○○ 씨는 더 오래전의 전통조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일관회가 생기기 전에도 마을에는 모임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관상, 관동, 관신 마을이 함께 운영한 대동계가 있었다. 1945년도에 11살이었는데 당시에도 대동계가 있었으니 그 전에도 대동계는 있었다고 본다. 대동계는 여신(돈 빌려주는 것) 기능도 하였는데 가가호호 돈을 모아서 기금을 만들었고 술멕이 놀이를 관장하였다. 대동계의 책임자인 계장은 별도로 있었으며 마을의 최고 어른을 좌장이라고 불렀다. 대동계는 청년층에서 주도하여 젊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민속의 맥 잇는 관동·관신·관상 마을

마을 외부에서 관상리의 백중놀이는 경로사상을 고취하고 주민 간 화합과 단합을 도모하는 행사로 이름이 나 있다. 주민들은 1977년부터 매년 백중날(음력 7월 15일) 1주일을 전후해 백중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이날만큼은 농사일 등 만사를 제쳐놓고 아침 일찍 마을 주변의 풀 등을 제거하는 마을 청소를 하였다. 그 뒤 주민이 모두 모여 장만한 음식 등을 나누고 체육행사 등으로 흥겨운 마을 축제를 벌이고 있다.

원래 백중놀이는 벼농사에서 초벌·두벌·세벌 김매기를 마치고 머슴을 비롯한 농군 등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나눠먹고 북·장구를 치며 즐기는 한편, 농사가 제일 잘된 집의 머슴을 두레장원이라 하여 황소 등에 태우고 마을을 돌기도 하는 민속놀이로 ‘호미씻이’라고도 한다. 시대변화로 백중의 의미는 퇴색했지만, 관상리 주민들은 농사일에 노고가 많은 노인들을 위로하고 주민들의 친목도모와 화합을 위해 백중날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일관회 회장은 “관상리 백중의 날 행사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데에는 회원들의 노고와 함께 남자들이 환갑을 맞아도 잔치를 하지 않고 30만∼50만원을 기금으로 내놓는 전통이 세워진 것도 큰 몫을 하고 있다. 백중날 행사 개최로 전통의 계승은 물론 노인공경과 마을주민들의 화합 및 단합을 도모하는 효과가 크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