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산신당 그리고 장승과 솟대_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2020. 10. 5 오후 4:16

마을 현황

  • 세대와 인구: 165가구 352명.
  • 역사와 유래: 반포면은 백제시대에는 웅천, 신라시대에는 웅주에 속해 있었으며 신라와 경계한 탄현과 동부산성으로 드나드는 발길이 끊일 새 없는 지역이었다. 큰 둠벙이 있어 신소라고도 불렀으며, 신소골 위에 위치하여 상신소 또는 상신이라 하였다. 본래 반포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상신리가 되었다. 1995년 공주군이 공주시와 통합되면서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가 되었다. 마을의 지명과 관련해서 조선 후기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이 마을의 이름이 상신소, 하신소로 기록되어 있다. 소(所)는 향소부곡으로 불리던 특수한 집단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 일대가 유명한 도자기와 기와의 산지였다는 것과 소라는 명칭을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 주요 소득원: 사과, 배, 복숭아.
  • 마을의 특징: 상신리의 남부와 서부, 북부에는 각각 해발 고도 700여m와 400여m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남부에는 삼불봉(三佛峰)과 수정봉이 높이 솟아 있다. 동부와 중부에는 용수천의 지류가 동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해발고도 100여m에 형성된 평야가 있다. 반포면의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수천 주변의 평야는 답작지대로 산기슭에서는 과수 농사와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천 주변의 평야 지대에 상신·부도골 등의 촌락이 들어서 있고 문화유적으로는 구룡사지와 상신리 당간지주가 있다.
    토질이 척박하고 지형이 험한 자연촌락이어서 예전부터 밭농사에 의존하여 온 곳이다. 이런 생활환경 조건은 평야 지역과 달리 민속문화 자료가 비교적 잘 보존, 전승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

마을공동체 전통유물 전승실태

[마을 민속과 문화 환경]

상신마을은 첩첩이 산으로 빙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는 동천(洞天)이다. 이곳은 산자락이 네 번을 돌아 사동천이라 하고 동천마을이라고도 한다. 유성 사람들이 갑사나 경천장을 가기 위해 동천마을로 걸어 들어와서 산을 넘어 다니던 고삿재 길과 구재 길이 있다. 마을에서 바라보는 하신리와 학봉리의 경계에 장군봉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산신 할머니에게 개국의 소원을 빌기 위해 산에 올랐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도를 올려 산신할머니의 영험을 받고 조선을 개국하게 되어 상하신 주민들은 임금봉이라 부르고 외지인들은 장군봉이라 부른다.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이 감싸고 있는 마을로, 계룡산이 그 위용을 갖추고 우뚝 솟아있으면서 어머니 품속 같이 포근하다. 뒷산을 ‘솥봉’ 또는 ‘가마봉’이라 부르는데, 지명에 얽힌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아주 오랜 옛날 산 아랫마을에 석공 부부와 두 딸이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석공이 독이 있는 음식을 잘못 먹고 급사하게 되자,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산속에서 나물을 캐고 나무를 해서 먹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석공의 아내가 산나물을 뜯고 있다 사냥을 나온 인근 고을의 원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원님은 한눈에 이 여인에게 반하여 억지로 끌고 가서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명령하였다. 석공의 아내는 완강하게 거부하였고, 원님은 끝까지 싫다고 하면 가마솥의 끓는 물에 집어넣어 죽이겠노라고 협박하였다. 그래도 여인이 끝내 싫다 하니 원님은 처음 만났던 그 산속으로 여인을 다시 데리고 가 물을 끓인 후 빠뜨려 죽이고 말았다. 그 후 석공의 두 딸이 어머니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하고, 통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한 끝에 1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사냥 나온 원님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 죽은 여인의 혼은 이승을 맴돌며 지금도 비 오는 밤이나 안개가 낀 날에 큰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산중턱에 솥을 걸었던 자리에 사람 형상의 바위가 생겨나 ‘사람바위’ 혹은 ‘아내바위’라 불렀고, 그 산은 ‘솥봉’ 또는 ‘가마봉’이라 불린다.

상신리의 거리제는 마을 공동의 두레굿 성격이 강하다.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풍물패의 굿과 유교식의 제례가 혼합된 모습을 띠면서, 풍물굿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마을의 거리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의 재앙이나 질병을 예방하고 퇴치하려는 목적이 있다. 거리제가 산신제와 구별되는 것은 거리제의 선발 기준이 덜 엄격하고 나무꾼 대신 풍물패를 뽑는다는 점이다. 제주는 이장이 맡아서 하고 거리제는 대보름 새벽에 지낸다. 유사가 축문을 읽고 마을 사람들은 소지를 올려 한 해의 무사태평과 개인의 소원을 빈다. 

[공동체 민속 유물]

  • 산신당: 상신마을의 대표적인 동제인 산신제는 정월 초이틀과 시월 초하루에 제를 올린다 하여 춘추산제(春秋山祭)라고도 한다. 정면 1칸과 측면 1칸의 목조건물 위에 기와를 얹은 지붕은 금방이라도 학이 되어 창공으로 날아갈 듯 추녀 끝의 곡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산신제는 먼저 제일 10일 전부터 준비한다. 먼저 주민들은 마을회관이나 마당 넓은 집에 모여 제를 주관할 사람을 선출한다. 산신당 앞까지 나뭇짐을 운반할 나무꾼과 밥하는 사람을 뽑고, 제관은 따로 선출했는데 현재는 이장과 새마을지도자가 제관이 되어 제를 지낸다. 제를 지내기 위해 사람을 뽑을 때에는 금기가 있다. “시원찮은 사람은 안 되아, 거짓말하는 사람은 안 되아, 피를 보았다던지 이런 사람은 안 되아, 상갓집 가는 것은 절대 안 되고”라며 마을 노인회장이 힘주어 강조한다.
  • 장승·솟대: 상신마을 입구 2차선이 끝나는 곳에 거꾸로 선 장승과 철거한 장승 8기가 세워져 있다. 높이 280㎝ 3기, 260㎝ 2기, 300㎝ 1기, 250㎝ 1기, 210㎝ 1기이다. 진덕교는 덕으로 나가라는 의미로 밖에 나가서 흐트러졌던 자세를 이 다리를 건너면서 정돈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올곧은 행실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 양쪽으로 솟대와 장승이 두 무리로 서 있다. 마을 입구에 세우는 솟대는 상신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상징물이다.
    음력 정월 열나흘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유사 집에 모여 길한 방위를 가려서 장승을 만들 재목을 구하러 나선다. 이때 풍물패가 풍물을 치며 뒤를 따른다. 좋은 방위에서 나무를 베기 전에 그 앞에서 간단하게 술과 북어를 제물 삼아 산신에게 고한 후 톱과 낫으로 베기 시작한다. 베어낸 재목은 마을로 옮겨와 장승을 깎는다. 매년 보름날 첫 새벽 3시에서 3시 30분쯤 풍장을 치며 동네를 돌면 장승제가 시작된다. 제의 이름은 ‘장승제’ 또는 ‘노제’라고 하며, 보름에 지낸다 해서 ‘보름제’라고도 한다.
    전에는 매년 장승제를 지내고 장승을 새로 깎아 세우곤 했는데, 현재는 2년에 한 번씩 장승을 새로 깎아 세운다. 깎은 장승에는 ‘천하대장군’, ‘천하여장군’을 각각 새겨 넣는다. 장승은 길이 208㎝·정면 35㎝이고 얼굴은 길이 57㎝·정면 33㎝·측면 25㎝이다. 새로 깎은 장승을 세우기 전에 지난 해 장승은 따로 모아놓는다. 장승을 세울 때는 남녀 장승을 따로 동서로 분리하지 않고 천하대장군과 천하여장군을 한 곳에 세운다. 동편 장승 2기는 서편 장승 2기를 바라보도록 세우고, 서편 장승은 동편 장승을 바라보도록 마주 세운다. 또한 솟대를 장승과 함께 세우고, 솟대의 방향은 양쪽 모두 남쪽인 신도안을 바라보게 세운다. 솟대의 높이는 5m로 동쪽과 서쪽의 크기가 같다.
  • 입석: 1997년 6월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높이 240㎝·위 너비 20㎝·가운데 너비 40㎝·아래 너비 60㎝·두께 32㎝이며 방추형의 자연석이다. 글씨는 구한말 진도군수를 지내고 상신리에 은거하던 권중면이 새겨 놓은 것으로, 세로로 네 글자씩 ‘신야춘상 엄원일월’(莘野春狀 掩原日月, 상신 들녘의 춘하추동은 무릉도원의 세월이어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옆에 함께 놓여있는 입석은 높이 160㎝·위 너비 50㎝·아래 너비 60㎝·측면이 23㎝이다. 입석 앞쪽으로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장성바위’라고 부르는 입석은 마을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대보름에 거리제를 지내며, 몸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다.

  • 우물: 물을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했던 것은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상신마을의 가장 큰 보물은 역시 큰샘이다. 한때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살 수 있었던 근원은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신이라는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지닌 이 마을의 탄생과 발전에도 이 우물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도 정월 초이틀과 시월 초하루 산신제를 지낼 때에 이 우물에 금줄을 치고 물을 퍼낸다. 여기서 나오는 첫 번째 물을 받아서 그 물로 제물을 장만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상신 주민들은 이러한 의식을 통하여 서로 화합하며 금기를 지켜왔던 것이다. 우물에 지내는 제의 이름은 ‘샘제’, ‘우물제’, ‘용왕제’로 불리며, 한때는 1,500명까지 이 우물에 의지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