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금안리 쌍계정계_전남 나주

2020. 10. 5 오후 3:10
  •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 조사일 : 2016. 5. 18.

마을의 유래와 현황

금안리는 1400년대에 나주나씨와 나주지씨가 마을에 정착한 이후, 문평면 죽곡에서 거주하던 하동정씨 정지(鄭地) 장군의 증손인 정서(鄭鋤)가 1500년대에 금성산 아래 금안리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숲이 우거져 새들의 낙원이라 일컬어 ‘금안동(禽安洞)’이라 불리기도 하고, 나주정씨 정가신이 금혁(金革), 백마(白馬), 옥대(玉帶)를 하사받아 터를 잡은 곳이라 하여 ‘금안동(金鞍洞)’이라고도 한다.

마을에 각 성씨가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인천, 천변, 반송, 광곡, 수각, 원당, 송대, 영안, 구축, 월송, 송정, 금곡 등 12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었다. 금안리는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으로 꼽혔다고 한다. 12개의 자연마을 곳곳에는 서원, 정자, 재실 20여 곳 정도가 있고 효자비 등 비석이 100여개 정도 남아있다. 고려 때의 첨의중찬 정가신과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신숙주도 이곳 태생이다.

금안1리의 광곡마을은 가장 위쪽 넓은 골에 터를 잡아 넓은 골짜기란 뜻으로 광곡(廣谷)이라 했던 것이 행정구역 개편 때 송대(松大)와 백사정(白沙亭)을 합하여 현재의 광곡이 되었다. 수각마을은 쌍계정의 양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어 수곡(水谷)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 통폐합 때 수각(水各)으로 바뀌었다. 금안2리 원당(元當), 반송(半松) 마을은 1300년대 전후로 나주정씨가, 1400년대 전후로 풍산 홍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원당마을은 금안동 일대 자연마을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라 하여 원당이라 했는데, 원님 경원공의 별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반송마을은 주변에 소나무, 특히 노송이 많고 반석(盤石)과 같은 형상이 되어 있어 반송이라 하였으며, 우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금안3리 인천(仁川) 마을에는 나주정씨 정가신이 터를 잡고, 그 후 고령신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흥김씨의 순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마을 앞 숲을 울타리 삼아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이내촌(里內村)이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인천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인천마을에는 금석문으로 효자성와김공실적비(孝子省窩金公失跡碑)와 반환홍선생유허비(盤桓洪先生遺墟碑), 문정공설재선생유허비(文靖公雪齎先生遺墟碑), 효자송산홍공기행비(孝子松山洪公紀行碑)가 있다.

마을 주변의 주요 지명은 큰 바위가 있다 해서 붙여진 ‘바우배기’와 원당과 인천사이에 있는 등성이를 가리키는 ‘사장등’, 샘이 두 개 나란히 있는 들 이름인 ‘쌍씨암거리’, 금안리 동네 안에 흐르고 있는 냇물이 너무 급하게 동쪽으로 흘러내리니 이 물을 가두고 막기 위해 동내 동쪽으로 팽이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은 ‘숲정이’ 등이 전한다.

마을의 주요 문화재로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34호인 쌍계정과 정가신을 기리기 위해 1688년(숙종14년)에 세운 설재서원, 사암 박순을 흠모하여 1659년(효종10년)에 세운 월정서원이 있다. 나주시 통계연보에 따르면 2015년 현재 금안리의 총인구는 510명이며 65세 이상 인구는 152명이다.

공동체조직 전승 실태

쌍계정계는 1957년 4개 성씨의 문중들이 만든 조직으로 4개 성씨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4성계와 그 외의 성씨로 이뤄진 대동계가 합쳐진 조직이다. 4성계 회원은 나주정씨, 하동정씨, 풍산홍씨, 서흥김씨가 있고, 대동계 회원은 4성씨를 제외한 다른 성씨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쌍계정계는 문중계와 대동계의 성격을 복합적으로 가진 조직이며 예전에는 대동계에서 공동체조직 운영을 위한 재원충당을 상대적으로 많이 했지만, 근래에는 대동계의 재원이 축소되면서 4성계에서 많이 충당하고 있다. 근래의 쌍계정계 모임은 친목도모 성격이 강해지는데 구성원의 고령화로 별도의 사업을 위한 인적자원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현재는 계 소유의 재산관리와 쌍계정 누각을 관리하고 있다.

임원은 회장, 총무, 재무, 감사(2명), 유사(대동계 2명, 4성계 각 성씨별 1명) 총 10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임기는 3년이다. 감사는 쌍계정계 소유의 부동산과 각종 수익금을 감사한다. 쌍계정은 관리인을 두고 있는데 쌍계정 옆의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회원은 대부분이 이 마을 출신이지만 현재 거주지 기준으로 내부거주와 외부거주가 반반씩 나누어져 있다.

정기모임은 음력 4월 20일에 열리는 쌍계정 총회(1년 1회)가 있다. 임원회의는 1년에 2회하는데 첫 번째 회의는 총회 전 특정일에 총회 준비를 하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가을 무렵에 부동산 임대료를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된다. 이때 논의된 임대료는 임차인에게 임대료 고지서를 발송하고 쌍계정계 통장으로 입금되도록 한다. 출금결의서에는 임원의 날인이 필요하다. 소유한 부동산은 기존 소유하고 있던 산을 팔아서 마련한 1만평 가량의 논이 있다. 총회 경비는 점심식사 비용 수준이다.

총회 때 기록된 회의록, 통장관리, 수입 지출 내용은 모두 재무 담당자가 관리하고 있다. 현금은 사용하지 않고 모두 카드로 사용하여 카드사용기록을 남긴다. 총무는 회의를 소집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결산은 임원회의에서 1차로 발표하고 그 결과를 총회에서 유인물로 배포한다.

쌍계정 계모임은 통상적으로 20여 명이 모인다. 쌍계정 회원은 4성계와 대동계 회원으로 구분되는데, 4성계의 구성원은 자손들을 포함한다. 대동계는 35명의 나주유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80대이다. 4성계 이외에 생활이 윤택한 사람이 대동계원을 했었다.

4성계 회원은 주로 금안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4성씨의 자손 중 남자는 성인이 되면 자동으로 계원자격을 취득한다. 대동계는 지원자가 입계 절차를 거쳐야 하며 입계비는 고정된 것은 아니어서, 형편이 되는대로 납부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고 젊은 사람들의 참여도 저조하다. 50년 전에는 마을에 70~80호가 거주했으나 지금은 40호 정도로 가구당 1~2명이 거주한다. 참석인원은 예전에는 50명 정도였지만 요즘은 30명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최근 들어 모임 구성원의 참여가 저조하여 쌍계정 계모임의 지속성이 위협받고 있다.

쌍계정계가 지켜 온 전통문화나 교육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쌍계정계의 활동은 누각 보존을 위한 관리와 지역민의 소통을 위한 모임 등에 비중을 두고 있다.

400년 전통을 이어온 쌍계정계

금안리 사람들은 정가신과 신숙주라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서 명촌이 아니라 4백여 년간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고 마음을 합쳐서 마을을 가꾸자는 취지의 대동계를 이어 내려온 점이 명촌으로 꼽힐 만하다고 말한다. 대동계는 임진왜란 직후 황폐해진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을 계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쌍계정(雙溪亭)은 금안리에 위치한 정자의 이름으로 규약을 정하여 미풍양속을 지키도록 행하는 계회와 시회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금안동(리)은 쌍계정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가 지금도 시행되고 있으며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있어 공동체의 전통이 지속되고 있다. 현재도 정가신의 후손 나주정씨, 정서의 후손 하동정씨, 김건의 후손 서흥김씨, 홍천경의 후손 풍산홍씨 등 4개 성씨가 대동계를 이어가고 있다. 근래에는 이 사성문중에서 쌍계정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1957년에는 이들이 뜻을 합하여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임진왜란 때 쌍계정계 문서가 소각되기도 했지만 ‘나주 금안동 동계소장일괄문서’ 51점이 남아 있다. 문서에는 조선시대 중후기의 마을 형성과 발전과정, 마을 사람들의 구성과 신분간의 사회적 관계, 향촌사회의 조직 운영과 이를 둘러 싼 권력관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주목(羅州牧)의 역사상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로써 가치를 인정받게 되면서 나주시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