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당몰샘과 가리샘_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2020. 10. 5 오후 4:44

마을 현황

  • 세대와 인구: 105가구 230명. 실제 거주하는 가구는 87가구에 167명이다.
  • 역사와 유래: 마산면은 구례군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재지는 마산리이다. 사도리 남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는 충적평야가 있으며 동북쪽은 지리산 국립공원의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져 상사, 하사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신라 말 도선이 마을 앞 강변에서 우연히 이인을 만나 세상일을 두고 담론을 나눴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인은 말을 하지 않고 모래 위에 삼국 지도를 그려 삼국통일의 징조를 암시해 주었다고 하며, 도선이 이를 크게 깨닫고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다 하여 그때부터 사도라 칭하였다. 992년 고려 현종 11년 5월 지리산이 무너지고 1519년 조선 중종 14년 구례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등 산사태로 인해 임씨 성의 마을이 쓸려 내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해주오씨가 1524년 남원에서 이주해 오고 영천이씨가 1780년 무렵 순천에서 이주해 집성촌을 이루었다. 1535년경 문척에서 봉성장씨가 들어와 아랫사둘을 이루면서 윗사둘, 아랫사둘로 불려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사도리가 되었다.
  • 주요 소득원: 벼, 감.
  • 마을의 특징: 몇 해 전까지 100세를 넘긴 주민이 생존해 있었을 정도로 마을에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예부터 상사마을은 장수마을로 이름났으며, 장수의 비결로 당몰샘이 꼽히는데 명천으로 이름난 만큼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많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가옥으로는 고택 한옥인 쌍산재가 있다. 쌍산재 앞에는 “지리산 약초 뿌리 녹은 물이 다 흘러든다.”고 전해지는 당몰샘이 있다. 마을 뒤쪽에 있는 가리샘은 2∼3년 전에 복원하였으나 식수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상사마을은 한때 녹차 재배를 많이 해서 타 지역에 판매하기도 했었는데, 현재는 3가구만 녹차를 재배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전통유물 전승실태

[마을 민속과 문화 환경]

상수도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마을마다 공동 우물이 있었는데 당몰샘은 ‘나눔의 샘’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샘은 해주오씨 고택인 쌍산재 담 안쪽에 있었다. 하지만 15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와 샘물을 길어가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마시자”며 담장을 샘 안쪽으로 들여쌓았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샘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수촌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은 장수의 비결이 마을의 식수원이 되고 있는 당물샘의 물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장수촌 노인들의 세포는 매우 깨끗하고 투명하게 보이는데 불필요한 화학합성약 등은 먹지 않고 깨끗한 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 우물은 부녀자들의 만남의 장소이고 다양한 정보를 교류하는 문화적인 공간의 역할을 하였다.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고 일정하게 물이 솟아나는 당몰샘 역시 마을 부녀자들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다. 단순히 물을 마시거나 쌀과 음식 재료를 씻고 빨래를 하는 기능을 넘어 생명창조의 잉태를 기원했던 부녀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오늘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로 인해 자연 우물이나 샘이 메워지고 축소되는 현실 앞에서 이렇듯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제대로 보존·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풍수지리상 마을 밖으로 좋은 기운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오씨 시조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돌탑이 있다. 돌탑은 마을 입구의 남쪽에 무덤 모양으로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으며, 전에는 마을에서 동제를 지냈는데 현재는 제를 지내고 있지 않다.

[공동체 민속 유물]

  • 당몰샘: 가로 93㎝·세로 97㎝·물 깊이 60㎝, 우물 둘레석부터 바닥까지 총 깊이 110㎝이며 수로의 길이는 415㎝·폭 30㎝이다. 고려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당몰샘은 쌍산재 앞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 자락의 약초 뿌리가 녹아 흘러들면서 천년의 세월을 지나왔지만 이끼가 끼지 않고 현재도 맑게 솟아나고 있다. 본래 샘은 쌍산재 안마당에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편하게 물을 길어다 먹도록 하기 위해 고택의 주인장이 담장을 안쪽으로 들여서 쌓았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전국 10대 약수터 가운데 하나로 물맛이 좋아야 장맛도 좋고 음식의 맛도 좋아 장수한다는 이치를 느끼게 한다.
    조선 말 전국의 명당을 찾아 헤매던 의성김씨 선조가 이 샘물을 저울에 달아봤는데 물 무게가 다른 곳보다 많이 나가고 수량이 풍부해 이곳에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94) 물 한 그릇 마시고자 다가간 샘에는 어느 묵객의 서화인지 모르겠으나 천년고리 감로영천(千年古里 甘露靈泉)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 가리샘: 가로 90㎝·세로 95㎝·물깊이 60㎝이다. 가리샘은 마을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갈(葛)샘이다. 형국으로 보면 가마(駕)의 모습이나 주변 산에 칡넝쿨이 즐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내판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가마의 모양이 이해가 된다. “150년 전 광양현에서 민중봉기에 실패한 한 젊은이가 이 마을까지 피신을 하게 된다. 그는 칡덩굴 숲에 몸을 숨기고 갈근으로 목숨을 부지해가며 개벽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범상치 않은 젊은이의 모습이 촌장의 눈에 띄게 되었다. 촌장은 그의 기상과 절개 그리고 학식을 높게 사 관가에 밀고하지 않는 대신 마을 일과 서당교육을 맡겼다. 그래도 젊은이의 일탈을 우려한 촌장은 그가 잠이 들 때마다 칡덩굴로 발목을 묶어 주저 앉혔고 마침내 마을 처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그 곳이 바로 가리샘이다. 그 후로도 몸을 낮추어 마을로 찾아든 사람들이 물을 떠 놓고 결혼하는 자리가 되곤 하였다.” 1925년 마을 사람들이 가마를 본떠 만든 우물가의 가마틀이 오늘에 이른다.
  • 돌탑: 풍수상 마을의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 자연석을 쌓은 돌무더기로 가로 5m·높이 5m·둘레 20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