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잔수농악을 전승해온 신월리 신촌 농악위친계_전남 구례

2020. 10. 5 오후 3:06
  • 전남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
  • 조사일 : 2016. 5. 19.

※ 마을 구성원 면담조사와 함께 『구례 잔수농악』 (이경엽 외, 2007)을 참고하여 작성함

마을의 유래와 현황

“섬진강 물이 소리 없이 잔잔하게 흐른다.”고 하여 ‘잔수’ 또는 ‘잔수동’ 이라 불린 이곳에는 신촌(新村)과 월암(月岩) 두 자연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신촌’이라는 마을이름은 옛날 대홍수가 난 이후 각지에서 온 이주민이 정착하여 마을을 새로 세웠다 하여 유래한 것이라 하며, 구례의 서쪽 입구 섬진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월암이라는 명칭은 뒷산이 동서로 감돌아 마을 모양이 둥근 달과 같이 생겼고, 마을 복판 상단과 하단 복판에 큰 바위가 있다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 청송 심씨가 정착하고 이어서 추씨, 김씨, 이씨 등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계사면 소재지로 봉서리, 원방리, 신월리, 계산리, 유곡리 일원을 관할한 중심지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신월리 신촌’이라 하고 구례읍에 편입되었다. 과거 잔수마을은 나루가 설치된 교통의 요지였다. 잔수진(潺水津)이라는 지명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강물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구역이어서, 섬진강 좌우를 연결하는 주요 나루 중의 하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잔수역(潺水驛) 잔수원(潺水院)이 잔수진 언덕에 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잔수역과 잔수원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역·원의 역할을 담당했다. 잔수 나루는 일제강점기(1937)에 구례교가 놓이기 전까지 유지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다리가 끊긴 기간에도 나룻배가 운영되었다.

잔수 마을은 옛 고을터라고 전한다. 그래서 구읍기(舊邑基)라고 하며, 관동(官東)머리, 관서당(官書堂)터, 구장(舊場)터, 옥(獄)밤이, 향교터 등의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주민들의 주요 생업은 농업이다. 논과 밭의 면적은 각각 16ha, 6ha 정도이다. 잔수 마을은 채소 농사에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어 예전부터 질 좋은 무와 배추 생산지로 이름 높았다. 40년 전부터 감나무를 심고 과수 농사에 집중한 결과 지금은 감 생산지로 명성을 얻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모두 160가구에 145명 정도가 거주하며,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많다.

공동체조직 전승 실태

마을공동체 조직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농악위친계이다. 농악위친계를 통해 전승해온 잔수농악은 2010년 10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위친계와 보존회는 별개의 조직이지만 그 내력을 살펴보면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위친계에서는 계원이 상을 당했을 때 명전과 조기를 회원들이 들고 간다. 임원으로는 계장, 총무, 감사가 각 1명씩 있다. 위친계의 수가 많을 때는 35명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25명만 남아있다. 위친계칙이 있으며 재정정산자료는 현금입출기록방식으로 남아있으며 별도의 회의록은 없다.

위친계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 회비 만원을 걷는다. 행사 불참시에는 벌금 5만원을 부과한다. 요즘은 상을 당하면 계에서 상가에 50만원씩 지급한다. 수입은 행사에 쓸 음식 준비 비용으로 사용한다. 통장에 잔고가 많이 남으면 계원들에게 선물을 돌리는 것으로 정산한다.

잔수농악보존회원은 총 65명으로, 마을 내 거주하는 정회원 45명과 마을 밖에 거주하는 특별회원 2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의 평균 나이는 68세로 젊은이가 드물다. 잔수농악보존회는 마을단위의 자치적인 모임이다. 잔수농악보존회로 국가지원금이 월 450만원이 나온다. 총회는 12월에 열리며, 이 자리에서는 새로 임원을 선출하고 재무를 결산한다.

과거 농악위친계가 주관한 행사로는 걸궁(정월 초사흗날과 8일)과 마을의 애경사(상여계 역할도 함)가 있다. 농악위친계에서는 섣달그믐부터 정월 3일까지는 마을에서 농악을 하고 3일 이후에는 걸궁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농악위친계에서는 초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굿을 해주었다. 이런 활동은 1985년도까지 지속되었으며, 구성원의 생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구례잔수농악을 이어온 농악위친계

구례잔수농악은 신촌의 옛 이름이 잔수(潺水)여서 잔수농악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잔수농악은 좌도농악 특유의 가락 구성을 갖춰 예능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을 농악의 전통이 잘 살아 있으며, 당산제와 마당밟이, 판굿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잔수농악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자세한 내력은 확인되지 않는다. 매년 마을 단위 공동체가 주기적으로 전승해왔기 때문에 주민들은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농악이 존재해 왔다고 믿고 있다.

동제인 당산제만굿은 매년 정월 초사흗날 농악대가 오전 10시부터 마을의 당산을 돌면서 굿을 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굿을 마친 후에 농악대는 마을의 각 가정집을 다니면서 액을 물리치기 위한 마당밟이를 하며 끝난 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판굿을 벌인다.

구례잔수농악은 전문적인 농악집단에 의해서 전승되는 것이 아니고 마을주민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마을농악이다. 잔수농악은 구례는 물론 인접한 순천, 남원 일대까지 그 명성이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농악의 운영과 관련된 문서도 전하고 있는데 1954년부터 작성된 「농악위친계칙(農樂爲親契則)」과 「농악위친계 계재수지부(農樂爲親契 契財收支簿)」가 그것으로 그 동안의 농악 관련 계칙과 재정 상태를 기록한 문서이다.

마을에서는 섣달 그믐날이면 5개의 당산에서 제를 올리며, 저녁 9시경에 동서남북의 당산과 회관 앞의 마을 중앙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제관은 이장, 개발 위원장, 개발 위원들이 맡는다. 대보름에는 당산굿을 하며 농악을 친다. 구례잔수농악은 전라 좌도농악으로 으뜸일 뿐만 아니라 전남에서도 알아주는 농악이었다. 한때 그 전승이 끊기다시피 하다가 최근 구례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