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공동체문화의 가치와 활용


3) 삼굿마을 신앙·의례 스토리 자원화

2020. 10. 6 오후 12:03

(1) 성황당

성황당은 녹전리 맨 안쪽 마을인 상유전에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성황당은 돌로 단을 쌓아 세운 목조건물인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전국의 대부분 성황당이 사라졌지만 주민들이 당번을 서면서 지켜내 그 원형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황당에서는 해마다 단종대왕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성황제를 지내고 있다. 단종대왕은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영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을수호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를 올리고 있다. 당집 내부에는 백마를 탄 단종 영정이 한가운데 걸려 있으며, 단종을 보위하기라도 하듯 용과 호랑이 그림이 양쪽에 걸려 있고 제단 위에 세워져 있는 위패에는 ‘태백산지신위(太白山神之神位)’라 씌어 있다.

성황제는 원래 음력 1월 14일 밤 자시에 올렸으며, 당주와 제관, 축관, 집사 등을 뽑을 때에는 생기복덕에 맞춰 엄격하게 선정하였다. 제일이 다가오면 성황당과 당주, 제관 등의 집에는 금줄을 치고 주변에 황토를 뿌려, 외부인과 부정한 것들의 출입을 금하였고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성황제를 지낼 때까지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제의 절차는 당주 댁에서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고 강신→참신→독축→소지→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고사 축문에는 단종대왕에게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화재, 수재, 풍재와 같은 재앙을 물리쳐 달라는 마을주민들의 기원이 담겨 있다.

성황당과 관련된 설화로 추익한(秋益漢)과 엄흥도(嚴興道)의 이야기가 마을주민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추익한과 엄흥도는 세종에게 왕위를 뺏기고 영월로 유배 온 단종을 끝까지 모신 충신들로 기억되고 있다. 추익한은 한성부윤을 지냈던 사람으로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어 관풍헌에 있을 때 산머루를 따다 바치며 자주 문안을 드렸다. 여느 때와 같이 그는 산머루를 따서 단종에게 문안을 드리러 영월로 내려오던 길에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타고 유유히 태백산 쪽으로 향하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단종에게 “대왕마마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하니, 단종은 “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면서 급히 단종의 거소를 가보니 이미 죽은 뒤였다. 추익한은 단종을 만났던 계사동까지 가서 그를 따라 죽었으며, 이후 단종과 같이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성황당에는 단종이 죽은 후 태백산신령이 되어 백마를 타고 올라갈 때 추익한이 머루를 따다 바치는 장면의 그림이 남아 있다. 엄흥도는 영월의 호장(戶長)을 지냈던 사람으로,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려서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冬乙支山)에 묻어주었다.

단종대왕에게 신의를 지킨 충신들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황당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서 벌을 받았다는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다. 여느 농촌마을이 다 그렇듯 삼굿마을도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인하여 성황제를 지내는 데 필요한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제관 선출과 제의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제를 지내는 시간은 밤 10시경으로 당겨졌으며, 제관을 선정할 때도 생기복덕을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맡기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삼굿축제를 개최하면서부터 제를 한 번 더 지내게 되었는데, 축제가 시작하는 날 아침에 성황당에서 지내는 고유제(告由祭)를 통해 마을수호신에게 축제의 성공적 개최와 참석자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2) 전통 혼례가마

삼굿마을에는 전통혼례를 올릴 때 신부가 타던 혼례 가마가 민속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혼례 가마는 70여 년 전에 단단하고 부식이 잘되지 않은 다릅나무를 마을 뒷산에서 베어와 목수를 불러다가 만들었다고 하며, 가마꾼 두 명이 앞뒤로 들어서 메었다. 삼굿마을에서는 이 가마를 다른 마을에 빌려주고 받은 곡식으로 마을기금을 조성해왔으며, 현재는 전통혼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삼굿마을 할머니들은 모두 이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다고 한다. 그만큼 마을주민들이 소중하게 여기면서 보존에 신경을 쓰고 있다. 가마는 신부가 친정에서 신랑과 초례를 치른 후 시댁으로 갈 때 타고 가는데, 이때 신부가 가마를 타기 전에 먼저 친정의 동네에서 잘사는 부부가 먼저 타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현재 잘 살고 있는 부부처럼 신랑과 신부도 잘 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신부가 시댁에 도착하면 가마에서 내린 다음 통과의례의 하나로 대문 앞에서 박을 깨고 감주를 마셨다고 한다.